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
동학농민혁명은 고종 31년(1894년)에 일어난 대규모 민중항쟁입니다. 이 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과 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으며, 1892년에서 1893년까지 동학교단의 조직적인 교조신원운동과 1894년 1월 고부 농민 봉기를 도화선으로 3월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혁명은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뉩니다.
문화체육부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선정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해, 4개 지자체가 추천한 지역 기념일을 대상으로 공청회 등을 거쳐 역사성, 상징성, 지역참여도 등 기준에 따라 기념일로서의 적합한 날을 심사해 왔습니다.
그 결과 5월 11일(황토현전승일)이 선정 되었습니다.
황토현전승일은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황토현 일대에서 최초로 전투를 벌여 동학농민군(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이 대승을 거둔 날로, 이 날을 계기로 농민군의 혁명 열기가 크게 고양되었고, 이후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높게 평가했고 이 날을 기념일로 선정하였습니다.
위원장은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측면과 기념일로서의 상징적 측면 그리고 지역의 유적지 보존 실태와 계승을 위한 노력 등을 감안할 때 황토현전승일이 기념일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라며, “이번 기념일 선정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애국·애족 정신이 더욱 계승되고 발전되기를 기원한다.”라고 전했습니다.
동학교는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었는데,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봉건사회를 반대하고 서학과 왜를 배척하는 반 외세사상을 주장하면서 점차 그 교세가 확산되었습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동학을 사교로 금지하고 1864년에는 교조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하는 등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였습니다.
※ "혹세무민"은 고사성어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惑(혹): 미혹할 혹, 世(세): 인간 세, 誣(무): 속일 무, 民(민): 백성 민]
그러나 제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동학은 농민 중심으로 더욱 확산·조직화됐고, 이후 동학의 창시자였던 최제우의 억울함을 해소하고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조신원운동 이후에도 정부의 묵살은 계속됐고 여기에 전라도군수 조병갑의 불법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894년 1월 동학교도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라·충청 일대 농민들을 모아 고부 관아를 습격해 고부민란(古阜民亂)을 일으켰고, 관아를 점령한 전봉준은 정부에 조병갑의 횡포를 시정할 것과 외국 상인의 침투를 금지하라는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했으며, 정부로부터 폐정을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부민란을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는 오히려 민란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몰아 혹독하게 탄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차 고부봉기(반봉건운동) 이용태의 횡포가 심해지자 전봉준은 무장 지역의 손화중과 합심해 다시 수천 명의 농민들을 모아 1894년 3월 21일 최시형의 탄생일을 기해 궐기하게 됩니다. 이 사태를 접한 정부는 장위영 등의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농민군은 황토재 승리에 이어 정읍, 흥덕, 고창, 영광, 함평, 장성, 나주, 장성, 태인, 부안 등에서 관군을 무찌른 것은 물론 삼남지방을 휩쓸면서 전주성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주성 점령 후 관군과 농민군의 접전으로 양측은 큰 타격을 입게 되고, 조선 정부는 청에게 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청일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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